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생활의기억

성폭력사건을 전담하는 재판부 일을 맡아서 한 게 근 1년쯤 되었다. 이제 한 달 정도 일을 더 하면 여기서 떠난다. 총평하자면 상대적으로 재판이 많은 부서였다. 성폭력사건의 형량이 늘어난(이전 법에 비하면 '증폭' 수준이다) 후로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피고인의 수도 증폭되었고, 재판 시간도 더불어 증폭되었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하면 간략히 증거를 조사하고 그에 기반해서 판결문을 쓰면 끝인데, 공소사실을 부인하면 길어지기 때문이다.

성폭력재판의 개요:
-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부인하면 수사기관에서 피해자나 참고인이 진술한 것을 그대로 증거로 쓸 수가 없기 때문에 피해자나 참고인을 증인으로 불러 법정에서 신문하게 된다.
- 만일 증인으로 나와야 할 피해자가 청소년이거나 장애인이라면 가급적이면 피해자를 증인으로 부르지 않고, 대신 수사기관에서 녹화해 두었던 피해자의 진술녹화 동영상을 법정에서 재생하는 방법으로 조사한다.
- 피해자와 신뢰관계에 있는 피해자의 부모나 전담 상담사가 진술녹화 당시 동석하였다가 나중에 피해자 대신 증인으로 출석해 법정에서 진술녹화 동영상을 같이 보고, 편집이나 개작 없이 그대로 촬영되어 있는지 여부에 관하여 증언한다. 그대로라고 하면 이로써 진술녹화 동영상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재판 중 겪는 3단 멘붕:
- 슬프게도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청소년이거나 장애인이고, 많은 경우 청소년인 동시에 장애인이다.
- 많이 좋아졌지만,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여전히 충분한 지지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피해자의 모친조차 피해 사실을 없었던 일로 하기 위해 피해자를 찍어누르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지지/보호받는 사람이 성범죄의 타겟이 되는 일 자체가 드물다.
- 그런 한편 대부분의 피고인들도 사회계층상 최약체다.

화/수/금요일에 재판을 하고 남은 날에는 사무실 책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데스크워크의 난이도가 높지는 않다. 지금처럼 가끔씩 시간이 나면 괜찮은가 하고 나의 내부를 살펴볼 때도 있다. 살펴보는 김에 물어본다. 배운 대로 화가 안 난 것처럼 가장해서 일을 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일에다 화를 좀 풀어 놓는 것이 좋은가.

당연히 내가 화가 나는 정도에다가 일을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건을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 수 있다. 그런데 기다려 보면 그와 비슷한 다른 어떤 사건은 더 화가 나는 또다른 사건에 묻히는 때도 있다. 화는 계량되지 않는다. 솔직히 내 감정이나 네*버 댓글러의 감정이나 엇비슷하지만 댓글대로 처리한다 치면 살아남을 사람이 드물겠고, 개화된 문명 국가에서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인간이 인간에 관하여 하는 일이다. 형을 정할 때 피해자 측에서 화가 난 정도(피해감정)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결국 내 화는 누르고 피해자 측의 화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화를 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에는 어떤가. 어느 피해자는 지적장애가 너무 심한 나머지, 사건 후 석 달도 안 되어 피해사실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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